영광의 깃발
리치먼드(Richmond)의 침보라소(Chimborazo) 의료박물관과 매기 워커(Maggie Walker) 국립사적지
미국 남북전쟁 1861~65년 기간에 남부연합의 수도였던 리치먼드(Richmond)는 워싱턴 남쪽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위치해서, 우리에게는 마치 '서울-평양'과 같은 느낌을 준다. 재작년에 그 도시에 있는 버지니아 주청사만 잠깐 방문해서 소개를 한 적이 있는데, 거기와 다른 남부 버지니아 지역의 국립 공원들 총 5곳을 묶어서 '1탄 펜실베니아'에 이은 3~4시간 거리의 별볼일 없는 곳들 찾아다니기 시리즈 2탄으로 또 다녀왔다.
지도에 표시된 5곳을 북쪽 집에서 출발해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서, 리치먼드 시내의 2곳은 마지막에 잠깐씩만 들렀기에 묶어서 제일 먼저 소개한다. 이 여행은 블로그 역사상 처음으로 경로의 역순(逆順)으로 글을 쓰는데, 그 이유는 이어질 시리즈 내용을 차례로 잘 읽어보시면 알게 된다.
리치먼드와 그 외곽의 남북전쟁 관련 장소들이 리치먼드 국립전장공원(Richmond National Battlefield Park)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여기는 시내 공원에 위치한 비지터센터로 간판 아래쪽에 의료박물관(Medical Museum)이라 씌여있다. 일단 '침보라소(Chimborazo)'는 여기 야트막한 언덕과 공원의 이름이기도 한데, 생뚱맞게도 중미 에콰도르(Ecuador)의 가장 높은 해발 6,310 m 성층화산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전체 공원 지도를 예의상 올려보는데, 도시 외곽에 1862년의 7일 전투(Seven Days' Battle)와 1864년 콜드하버 전투(Battle of Cold Harbor) 유적지들이 메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관계상 4곳의 비지터센터들 중에서 시내에 있는 여기 하나만 잠깐 들리는 것으로 위기주부의 국립 공원들 방문 리스트에 추가하기로...^^
남북전쟁 기간 동안에 부상당한 남군 병사들의 치료를 위한 군사병원(military hospital)이 이 언덕에 만들어졌었는데, 목재로 만들었던 150동의 건물은 현재 하나도 남아있지 않고, 비지터센터로 사용되는 이 건물은 1900년대 초에 연방정부가 기상관측용으로 지은 것이라 한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여기에 있던 병원에서 전쟁기간 동안에 76,000명 이상의 부상병을 치료하며 사망률은 10% 미만이라서, 당시로는 전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면서 치료수준도 높았던 병원이라 할 수 있단다.
목수(carpenter)의 연장 가방이 아니라, 19세기 중반 외과의사(surgeon)의 치료 가방이란다.
남군 군의관의 복장과 무기를 비롯해 그들의 활약상에 대한 소개 등도 전시되어 있었다.
위기주부는 의대 진학은 꿈도 꿔본 적이 없고, 피를 보면 약간의 경기도 일으키는 체질이라서, 당시의 의료상황 등을 소개하는 전시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가 않았다.^^ 여기에는 또 활톱(hacksaw)이 전시된 것이 보이는데, 이런 도구들로...
당시 어떻게 부상당한 다리를 절단했는지 친절하게 그림으로 설명을 해놓았다. 이 정도로 리치먼드 국립전장공원에 속하는 침보라소 의료박물관(Chimborazo Medical Museum) 구경은 마치고, 밖으로 나가서 공원을 잠깐 둘러보았다.
사진 가운데 실루엣으로 보이는 동상이 여기서 유명하다고 해서 찾아가는 길인데, 그 동상은 바로 무엇인고 하니...
자유의 여신상이다~ㅎㅎ 1950년에 시작된 미국 보이스카웃 연맹의 'Strengthen the Arm of Liberty'라는 캠페인으로 미국 전역에 높이 2.5 m의 이런 동상이 약 200개나 세워졌는데, 현재 약 100개 정도가 남았다고 한다.
캠페인 제목에 따라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횃불을 들고 있는 팔이 약간 비정상적으로 길어 보였다. 전체적으로 심하게 때가 탄 것은 물론이고 왕관도 일부 부러져 있어서, 청소와 보수가 좀 필요해 보였다.
나무들 너머로 제임스 강(James River)이 살짝 내려다 보이는 언덕의 끝쪽으로 걸어가면, 여기에 앞서 설명한 침보라소 병원(Chimborazo Hospital)이 있었다는 동판을 볼 수 있다. 이제 북부 버지니아와는 뭔가 살짝 분위기가 다른 남부 리치먼드 시내를 운전해서 마지막 목적지를 급하게 찾아갔다.
구글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데로 찾아왔는데, 공원 홈페이지에 나온 건물 모습과는 살짝 다른 여기는 매기워커 국립사적지(Maggie L Walker National Historic Site)이다.
입구가 어딘지 두리번거리다가 비지터센터는 건물 사이 통로를 이용해 안뜰로 들어가라는 표지판을 겨우 찾았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비지터센터가 5시가 아니라 4시반까지만 운영한다고 되어 있는데, 이 때는 이미 그 시간을 살짝 넘기고 있었지만 문이 잠기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열고 들어갔더니, 국립공원청 파크레인저 예닐곱명이 모여서 퇴근 준비를 하면서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다가, 갑자기 들어오는 동양남자 한 명을 보고는 상당히 놀라더라는...ㅎㅎ
매기 워커(Maggie Lena Walker)는 흑인 노예의 딸로 태어난 교육자 겸 사업가로, 1903년에 미국 최초의 여성 은행장이 되어서 흑인들의 자립을 도운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모든 여성과 장애인들의 인권신장에도 기여해서 그녀가 살았던 집이 1975년에 국립사적지로 지정되었는데, 여기는 옆건물에 만들어진 비지터센터고 다른 외관의 보존된 집은 주차한 곳 반대쪽인데 늦어서 들어가볼 수는 없었다.
이 날 하루 이미 계기판에 찍힌 누적 운전시간이 9시간이었지만, 또 2시간을 더 운전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길 건너편 소방서 건물에 그려진 벽화를 감상했다. 다른 파크레인저 한 명이 또 모임에 참여하려고 비지터센터로 들어가는 모습인데, 참 팔자 좋은 연방 공무원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거슬러서 이 날 이전에 방문했던 다른 국립 공원들을 소개하며 남북전쟁과 흑인 지도자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남북전쟁 최초의 불런(Bull Run) 전쟁터인 매너서스 국립전장공원(Manassas National Battlefield Park)
미국의 남북전쟁은 링컨 대통령의 취임 직후인 1861년 4월 12일 새벽에, 이미 연방을 탈퇴한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계속 연방군이 주둔하고 있던 섬터 요새(Fort Sumter)를 남군이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일방적인 포격을 받은 요새의 지휘관이 다음 날 오후에 남군에 항복을 하고 요새를 내어주었기 때문에, 남과 북 사이에 직접적인 교전은 없었다. (북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예포를 발사하다가 대포가 폭발하는 사고로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한 것이 남북을 통틀어 첫번째 인명 피해임) 본격적인 전쟁의 시작은 그로부터 약 3개월 후에 북부 버지니아에서 시작되었다.
대지가 완전히 초록으로 물들기 시작했던 지난 4월에, 버지니아 최대의 한인타운인 센터빌(Centreville)의 서쪽에 있는 게인스빌(Gainesville)에 일이 있어서 다녀오는 길에 그 두 마을의 사이에 있는 매너서스 국립전장공원(Manassas National Battlefield Park)을 방문했는데, 집에서는 30분 정도 거리이다. 국립공원청에서 관리하는 군사공원의 한 종류인 배틀필드파크(Battlefield Park)는 전적지공원 또는 전쟁터공원으로 부를 수도 있지만, 이 블로그에서는 그냥 전장공원(戰場公園)으로 한 글자 줄여서 부르기로 한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던 하얀 건물은 헨리힐 비지터센터(Henry Hill Visitor Center)이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이 전쟁터는 1861년 7월 21일에 미국 남과 북의 첫번째 불런 전투(First Battle of Bull Run)가 벌어진 곳으로, 황소가 달리는 곳이 아니라 미동부에서는 물이 흐르는 개울을 '런(run)'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번역하자면 황소개울 싸움...
안내데스크 뒤로 공원의 지도가 보이는데, 우리는 비지터센터 뒤쪽 들판만 돌아보는 짧은 트레일을 했기 때문에, 전체 공원지도를 따로 보여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참고로 공원 서쪽에서 이듬해인 1862년 8월에도 전투가 벌어져서, 두 전쟁터를 묶어서 하나의 국립공원으로 관리가 되고 있다. 10시가 조금 지났는데 안내영화는 11시 정각에 시작한다고 해서, 트레일을 먼저 하고와서 보기로 했다.
비지터센터 뒷문으로 나오니 푸른 초원 너머로 옛날 건물들과 기념비가 나무 난간과 함께 만들어져 있고, 그 너머로는 하얀 천막들도 많이 보였다. 무엇보다도 우리 부부가 반가워 했던 것은...
이 대포들이다~ 지난 번 게티스버그 국립군사공원(Gettysburg National Military Park)에서 대포와 사랑에 빠지신 사모님... 안 말리면 그대로 주차장까지 끌고 가서 우리 차 뒤에 붙들어 메고 집으로 가지고 가실 것 같았다.^^
대포들이 잘 나와야 한다고, 커플셀카를 몇 번이나 찍었는지 모른다. 아내가 쓰고있는 모자는 "Parents of 23"이라는 뜻인데, 정말로 내년이면 벌써 딸이 대학교 졸업이다. (미국은 한국과는 달리 입학연도가 아니라 졸업연도로 학년을 구분함)
불런 기념비(Bull Run Monument)는 4년간의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인 1865년에 6월에, 여기 헨리힐의 유해를 수습하는 임무를 맡았던 연방군 병사들이 3주만에 만들어서 세운 것으로, 남북전쟁과 관련된 기념물로는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하얀 천막이 만들어져 있던 곳에는 이렇게 옛날 복장을 하고 마차를 끌고 나와서 무슨 장사를 하시는가 했는데, 과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오신 분들은 이 두 명만이 아니었다!
각양각색의 군복을 입고 머스킷 소총을 든 19세기 남부연합군 병사들이 20여명이나 모여 있었는데, 그들을 지금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21세기의 국립공원청 파크레인저...^^ 마침 일요일이라서 'Living History: Civilian & Infantry' 행사를 하는 것인데, 여름철에 매주 일요일마다 진행이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재연배우까지는 아니지만 진지한 모습의 사람들로 왠지 자원봉사같지는 않았다. 요 근래에 뮤지컬 해밀턴(Hamilton: An American Musical)이나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Bridgerton) 등의 역사극과 디즈니 영화에서도 인종불문 캐스팅이 유행이던데, 미국 남북전쟁 모습의 재연에 동양인도 받아줄까?
남부연합군과 함께 진군(?)하는 아내의 모습을 클릭해서 동영상으로 보실 수 있다. 비디오에서는 북소리도 나오고 마지막에는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의 펄럭이는 깃발도 보실 수 있다.
저 분은 업무시작과 동시에 잔디밭에 드러누웠는데, 아마도 누워서 휴식하는 병사가 자신이 맡은 배역일 수도 있겠다.^^ 조금 주변을 둘러보다가 루프트레일도 다 돌지 않고, 비지터센터 근처에 있는 가장 유명한 동상을 보러 가기로 했다. 참, 이 때는 몰랐는데 11시 정각에 병사들이 머스킷(musket) 소총을 실제로 발사하는 재연행사를 했다고 하는데 직접 못 봐서 아쉬웠다~
동상으로 걸어가는 길의 나무 아래에 있던 추모비 하나... 조지아 사바나(Savannah) 출신으로 켄터키 주의 부대를 이끌고 여기 버지니아에서 싸우다가, 이 자리에서 중상을 입고 사망한 Francis S. Bartow는 남북전쟁에서 최초로 사망한 남군의 장교라고 한다.
버지니아는 물론이고 미국 남부 곳곳에서 '스톤월(Stonewall)'이라는 단어를 자주 접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주인공이자 이 전쟁터에서 탄생한 스타라고 할 수 있는 남부연합의 토마스 잭슨(Thomas 'Stonewall' Jackson)의 동상이다. 한국에서도 뉴스 등을 통해서 본명보다는 오히려 '스톤월 잭슨'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고, 석벽(石壁) 또는 돌담 장군으로 번역해서 쓴 뉴스 기사나 글들도 많이 볼 수 있다.
동상의 반대편에는 잭슨에게 그러한 별명을 안긴 유명한 말이 씌여있는데, 북군에게 밀려서 후퇴하던 남군의 제3여단장이던 비(Barnard Elliott Bee, Jr.) 준장이 뒤쪽에 있던 버지니아 출신으로만 구성된 제1여단을 이끄는 잭슨 준장을 바라보며 아래와 같이 말했단다.
"There is Jackson standing like a stone wall. Let us determine to die here, and we will conquer. Rally behind the Virginians!"
저기 잭슨이 돌담처럼 버티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버지니아인들을 지원하자!
돌담처럼 버티고 선 잭슨이 지휘한 남군은 지원군이 올 때까지 5시간 동안 북군의 공세를 막아낸 후 반격에 성공해서 남북전쟁 첫번째 전투는 남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 후 2년 동안 '스톤월 잭슨(Stonewall Jackson)'으로 불리며 셰넌도어 계곡 등에서 전설적인 지휘관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1863년 게티스버그 직전의 챈슬러스빌(Chancellorsville) 전투가 끝난 후에 어이없는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사망한다. 만약 잭슨이 살아있었다면 게티스버그 전투의 첫날에 남군이 세메터리힐을 점령해서, 최소한 게티스버그 전투의 판도는 바뀌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내가 동상 앞에서 찍은 사진의 왼편에 멀리 보이던 이 기념물은 바로 잭슨에게 '스톤월'이라는 별명을 선사한 비(Bee)의 추모비인데, 그는 위의 말을 한 직후에 여기서 사망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위와 같이 말한 것은 맞지만, 자신의 부대는 전방에서 싸우는데 잭슨은 도와주러 안 오고 뒤쪽에 "돌담처럼 우두커니 서있다"고 화가 나서 한 말이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몸통이 비틀어지고 위쪽도 부러진게 수령이 2백년은 넘어 보이니, 아마도 이 나무는 160년 전에 이 언덕에서 있었던 남북전쟁 최초의 전투를 직접 목격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비지터센터로 돌아갔다.
영화시간까지 좀 남아서 전시장을 먼저 둘러봤는데, 입구에는 남군 병사들의 순진한 얼굴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사진 왼쪽에 처참한 흑백사진과 함께 '순수의 종말(The End of Innocence)'이라고 씌여있다. 이 말은 잠시 후에 본 무려 45분 길이의 안내영화의 제목이기도 한데, 이 첫번째 전투에서 남과 북은 각각 약 3만명의 군인들이 동원되어서 연방군 약 3천명과 남부군 약 2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투에 참가했던 남북의 여러 부대의 군복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에는 남과 북 모두 통일된 군복이 없었기 때문에 200종에 가까운 유니폼이 등장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군복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위 사진에서도 알 수 있지만 남부연합국의 깃발이 당시 미연방 국기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아군인지 적군인지 멀리서는 도저히 구분이 불가능했단다. 결국 이 전투가 끝나고 남부연합은 군기를 새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남부지역이나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집회에서 볼 수 있는 X자 모양의 남부연합기(Confederate Flag)이다.
마지막으로 1차 불런 전투의 진행상황을 보여주는 LED가 깜박이는 지도인데, 인적물적 자원이 우세했던 북군이 첫 전투에서 참패하면서, 남북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는 장기전이 된 것이다. (상세한 전쟁사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 이듬해인 1862년 8월에 벌어진 2차 불런 전투의 비지터센터와 기념비 등도 공원 서쪽에 따로 만들어져 있는데, 집에서 가깝기는 하지만 언제 또 방문해서 거기도 가 볼 수 있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미국 남북전쟁(Civil War)에서 가장 길었던 9달반의 군사작전인 피터스버그 포위전(Siege of Petersburg)
"움켜잡다/점령하다"라는 뜻의 영단어 'seize'와 스펠링과 발음, 그리고 의미까지 비슷해서 헷갈리는 다른 단어로 'siege'가 있다. 영어에 약했던 위기주부는 "가두다/포위하다"라는 뜻의 이 단어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던 때를 정확히 기억하는데, 바로 한국에 PC방 열풍을 일으켰던 컴퓨터 전략 게임인 스타크래프트(StarCraft)를 하면서, 테란 종족의 지상공격 무기에 시즈탱크(Siege Tank)가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본인의 주종족은 프로토스였는데... 정말 거의 30년전 이야기다! ㅎㅎ
말을 꺼낸 김에 찾아본 시즈탱크의 모습으로 애니메이션처럼 지지대로 땅에 고정되는 '시즈모드(siege mode)'를 개발하면, 엄청난 사거리의 포격으로 적의 기지와 방어선을 공성(攻城)하는 능력이 탁월한 무기였다. 옛날이라 비록 이런 탱크는 없었지만(^^) 북군이 무지막지한 크기의 대포를 만들면서까지, 남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피터스버그를 9개월 이상 둘러싸고 공격을 했던 것이 바로 피터스버그 포위전(Siege of Petersburg)이다.
1864년 남북전쟁 말기의 소위 '오버랜드 캠페인(Overland Campaign)'에서 양측의 이동경로를 보여주는 지도이다. 제일 위쪽의 The Wilderness와 Spotsylvania Court House 전투는 작년 여름에, 그랜트가 남군 수도 리치먼드를 점령하려다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Cold Harbor 전투는 시리즈 전편에서 잠깐씩 소개를 했었다. 그 후에 제일 아래의 여기 피터스버그를 점령하기 위해 9개월 이상 공성전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부근의 많은 전투지역과 북군의 보급기지였던 제임스 강변의 시티포인트(City Point) 등이 국립 공원인 피터스버그 국립전쟁터(Petersburg National Battlefield)로 지정이 되어 있고, 여기는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동부전선 안내소(Eastern Front Visitor Center)인데, 시작부터 커다란 대포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공성전의 의미를 살리려 했는지, 비지터센터 건물의 외관도 아주 튼튼한 성처럼 느껴졌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보시려면 클릭)
여기서 제임스 강을 따라서 하류로 내려가면, 재작년에 방문해서 잠깐 소개한 적이 있는 버지니아 식민지가 시작된 제임스타운(Jamestown)이 나오는데, 그 공원 안에 있던 역사적인 글래스하우스(Glasshouse)에서 만든 유리공예 제품을 전시판매하고 있는게 특이했다.
직원이 위기주부만을 위해서 안내영화 <Endurance Without Relief>를 틀어주었는데, 재연배우들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피터스버그 포위전을 이해하는데 역시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화면의 좌우 아래쪽으로 많이 보이는 것들이 모두 스피커였나?
앞서 잠깐 언급했던 특별 제작한 대포인 'The Dictator'로 지름 13인치에 무게 100 kg이 넘는 포탄을 2.5마일 거리까지 발사할 수 있었단다. 하지만 대포 자체의 무게가 8톤이 넘어서, 철도로만 운반이 가능했기 때문에 활용도가 낮아서 자주 사용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원형의 극장을 전시장이 둘러싸고 있는데, 그 사이에는 참호를 연상시키도록 땅을 파놓은 이유도 나중에 아시게 된다.
그렇게 비지터센터 구경을 마치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여기는 오토투어의 출발점 역할만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기는 했지만 레인저가 추천해 준 장소 두 곳은 둘러보기로 하고, 아래와 같은 일방통행 도로를 따라서 출발을 했다.
넓은 지역을 모두 표시한 공원 지도에서 피터스버그 시내와 가장 가까웠던 동부전선 지역만 크게 확대한 것으로, 연한 붉은색으로 띄엄띄엄 그려진 굵은 선들이 남군의 방어선을 나타낸다.
③번 Siege Encampment Exhibit로 양측이 9개월 이상 대치할 때, 병사들이 임시로 만들어 지냈던 통나무집과 함께...
당시의 참호를 재현해 놓았다. 1900년대 초의 제1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장면인 참호전이, 실질적으로 처음 등장한 전투가 피터스버그 포위전이라 한다.
다음으로 도착한 곳은 이 공원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인 ⑧번 The Crater이다. "여기에 무슨 분화구가 있다는 말이지?"
난간 안쪽으로 지금도 움푹 꺼져보이는 곳이 바로 그 '분화구'이다. 빨리 피터스버그를 함락시키고 리치먼드를 점령해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그랜트 장군의 지시로, 남군 방어선 아래로 몰래 땅굴을 파서, 1864년 7월 30일 새벽에 무려 8,000파운드의 화약을 폭발시켜서 지름 50 m에 깊이 9 m의 거대한 이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당연히 남군의 진지도 싹 다 날라가서, 그 무너진 틈으로 북군이 돌격을 했지만...
공원 브로셔 표지에 인쇄된 이 그림처럼 북군은 깊숙한 구덩이에 빠져서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고, 정신을 차린 주변의 남군이 반격을 해와서, 대부분 흑인으로 구성되었던 북군의 돌격부대는 거의 학살을 당하는 수준으로 무려 3,800명의 사상자를 내게 된다. 이 구덩이 전투(Battle of the Crater)의 실패로 그랜트는 전략을 바꿔서, 피터스버그를 포위하고 남군의 보급 철도망을 하나씩 끊어나가는 장기전에 돌입하게 된다.
확실히 여기는 남부 버지니아라서 그런지 구덩이 주변으로는 여기를 지키고 싸웠던 남군을 추모하는 기념물이 많이 보였는데, 앞쪽에 보이는 것은 노스캐롤라이나 부대를 기리는 것이고, 뒤로 보이는 탑은 그 날 반격을 주도한 남군의 마혼(Mahone) 장군 기념비이다.
그렇게 남군은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 이듬해 3월말까지 무려 9개월반을 버텼지만... 결국 마지막 보급선까지 끊어지고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이 총공세를 예고하자, 1865년 4월 2일 밤에 남군 총사령관 리(Lee) 장군은 피터스버그와 리치먼드를 동시에 포기하고 전병력을 유일한 탈출구인 서쪽으로 후퇴시키기로 결정한다. 그로부터 7일 후에 두 장군이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장소가 바로, 이 날 위기주부가 첫번째로 방문했던 곳으로 '남부 버지니아 별볼일 없는 국립 공원들'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 소개될 예정이다.
아래 배너를 클릭해서 위기주부의 유튜브 구독하기를 눌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