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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_연산군묘,정의공주묘_'20.8

풍달이 窓 |2020년 10월 1일

[연산군묘] 지정면적 1만4301㎡. 연산군은 실정(失政)이 극심하여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폐위되고 1506년(중종 1) 연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같 은해 9월 강화군 교동(喬桐)에 유배되었다.그 해 11월 유배지에서 죽어 강화에 장사지냈다가 1512년 12월 폐비 신씨(愼氏)의 진언으로 그 이듬해 이 곳에 천장(遷葬 : 묘를 옮김)하였다.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愼氏)는 영의정 승선(承善)의 딸로 1488년(성종 19) 2월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1494년 왕비로 진봉(進封)되었다가 1506년 연산군과 함께 폐출되어 부인(夫人)으로 강봉되었으며 1537년에 죽었다. 분묘는 서편에 연산군, 동편에 부인의 묘가 쌍분(雙墳)으로 되어 있다. 묘역은 대군(大君)의 예우(禮遇)로 장례하여

조선왕릉_의릉_'20.8

풍달이 窓 |2020년 10월 1일

[의릉懿陵] 경종은 숙종의 제1자로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소생이다. 숙종의 승하 후 경희궁에서 즉위하였으나 병약하여 재위 4년 만에 승하하였다. 선의왕후는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어유구(魚有龜)의 딸로 15세 때 세자빈이 되었다가 경종의 즉위와 더불어 왕비로 진봉(進封)되었는데, 26세로 소생없이 승하하였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나 이 능은 앞뒤로 비껴 능역을 조성하였다. 왕릉과 왕비릉이 각각 단릉(單陵)의 상설을 모두 갖추고, 뒤에 있는 왕릉에만 곡장(曲墻 : 굽은 담장)을 둘러 쌍릉임을 나타낸 배치이다. 이러한 전후능설제도(前後陵設制度)는 영릉(寧陵 :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에서 처음 나타난 형식으로서 풍수지리적으로 생기왕성한 정혈(正穴)에 봉릉(奉陵)한 것이다.

조선왕릉_정릉,아리랑시장_'20.8

풍달이 窓 |2020년 10월 1일

[정릉貞陵] 1396년(태조 5) 신덕왕후 강씨가 죽자 태조는 능역을 황화방 북원에 정하고 그 동쪽에 재궁 흥천사를 세워 자주 행차했다. 그러나 태조가 죽은 뒤인 1409년(태종 9) 묘를 사을한 골짜기로 옮겼으며 종묘에 부묘하지 않고 왕비의 제례를 폐했다. 1410년 태종은 정릉의 석물 중 일부인 병풍석을 광교의 돌다리로 사용했으며, 그밖의 석재나 목재들을 태평관 건립시 부속재로 이용했다. 1581년(선조 14) 삼사에서 신덕왕후 강씨의 시호와 존호를 복귀하고, 정릉을 회복하자는 논의가 있은 뒤, 1669년(현종 10) 송시열(宋時烈) 등이 다시 신덕왕후 강씨를 종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차자를 올림으로써 비로소 본격적인 복구작업과 이에 따른 수호군 및 모든 상설을 구비하게 되었다.

조선왕릉_태강릉_태릉,강릉_'20.8

풍달이 窓 |2020년 10월 1일

[태릉泰陵] 조선 제11대 왕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1501~1565)의 무덤이다.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무덤인 강릉(康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중종 옆에 묻힐 요량으로 장경왕후의 능 옆에 있었던 중종의 정릉(靖陵)을 풍수지리가 안 좋다 하여 선릉(宣陵) 옆으로 옮겼다. 하지만 새로 옮긴 정릉의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자 결국 그 자리에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예장되어 중종 옆에 묻히려던 소망을 이루지 못했다. 태릉은 왕비의 단릉(單陵)이라 믿기 힘들만큼 웅장한 능으로,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봉분을 감싼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