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대덕구 / 대덕구 여행 #5) 새로운 대전의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대덕구 여행 <우암사적공원>By 오렌지군의 행복을 찾아서.. | 2024년 2월 24일 | 스포츠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 선생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공원인 '우암사적공원'을 여행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송시열 선생이 '흥농서당(興農書堂)'과 '남간정사(南澗精舍)'를 세워 많은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며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책을 강구하였다고 합니다. 이 역사적인 장소가 이렇게 멋진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우암사적공원은 꽤 넓습니다. 약 1만 6천 평에 달하는 부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고요. 그래서 한 바퀴 돌아보는데 은근히 긴 시간이 걸리는데요. 이곳에서 볼만한 건축물은 입구 쪽에 있는 남간정사와 기국정, 그리고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고자 현대.......우암사적공원(14)대전여행(230)대전대덕구(7)송시열(8)우암송시열(7)대덕구여행(6)대덕구(8)대전(414)(대전 대덕구 / 대덕구 여행 #4) 새로운 대전의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대덕구 여행 <박팽년선생 유허, 남간정사>By 오렌지군의 행복을 찾아서.. | 2024년 2월 20일 | 스포츠대덕구를 지나 저는 대전 동구로 넘어왔습니다. 동구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가 바로 '우암사적공원'인데요. 저는 이 공원으로 가기 전에 먼저 주택가 안에 자리하고 있는 이곳부터 구경하고 가기로 했습니다. 바로 '박팽년 선생 유허'입니다. 박팽년 선생은 사육신 중 한 분이죠. 그래서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 박팽년 선생이 생전에 살았던 집이 있던 곳이 바로 이 '박팽년 선생 유허'입니다. 현재는 집은 없고 집터만 남아있는 상황인데요. 선생은 1417년에 현재의 대전 동구 가양동에서 태어났습니다. 평소 가야금 타기를 좋아해서 스스로 호를 '취금헌&#.......대전여행(230)박팽년(3)박팽년선생유허(1)대덕구여행(6)대덕구(8)송시열(8)대전대덕구(7)남간정사(9)우암사적공원(14)우암송시열(7)대전(414)가을날 우암사적공원을 거닐며By 대전광역시 공식블로그 | 2019년 11월 8일 | 요즘에 주말에는 어디로 나가시나요. 옛날 사람들의 배움을 청할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저는 추천하고 싶습니다. 가을빛이 완연한 우암사적공원. 울긋불긋 나뭇잎이 물들었습니다. 천천히 가을 날의 여유를 만끽하며 걸어봅니다. 역시 가을은 아름답네요.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천거했던 류성용은 조선시대의 인재였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때 활약하다가 전란이 끝나자 평범한 삶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며 고향으로 가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우암 송시열 역시 후학을 양성하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우암사적공원은 고요했습니다. 홀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여행지여서 좋았습니다. 류성용은 안동에 내려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방문자를 사양한 채 독서를 했습니다. 친한 벗이나 가족 외에 만남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낙향한 이후 경상감사가 만나기를 청했지만 사양하였고 친하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을 거부하였던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시간은 한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이가 젊던 나이를 먹었든 간에 그 시간은 한정적입니다. 올해의 가을느낌과 내년의 가을느낌은 또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중요한 시간을 간과하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에게는 일에 불과할 수 있지만 누군가에는 매우 소중한 기회일 수 있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순간순간 귀하게 생각하는 일 그것이 사람 관계에서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조선왕조 후반부에 가서 만들어진 서당 중 다수가 지방관의 허락 또는 묵인 하에 곳곳에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 교육 시스템은 많은 사람들이 성공이나 출세가 아닌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시스템으로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우암사적공원의 가을은 이렇게 무르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지난 달에는 이곳에서 ‘제24회 우암문화제’가 열리기도했씁니다. 숭모제례로 지역 주민들에게 뜻깊은 볼거리를 제공했으며, 전통 풍류 경연대회 및 전통다례 시연으로 옛 조선시대의 풍류문화를 이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전국 초·중·고등학생이 참가한 전국 우암백일장과 우암 포럼과 함께하는 골든벨이 펼쳐져 지역의 역사와 인문학에 대해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송시열(8)우암사적공원(14)우암송시열(7)정연주(34)대청호변 비룡동 줄골 장승과 은진송씨 이야기By 대전광역시 공식블로그 | 2019년 8월 8일 | 은진 송씨는 대전에 세거하던 대표성씨이면서 성리학의 대표학자인 송시열의 본관이기도 합니다. 대청호가 있던 지역은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많은 향토적인 흔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국도변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곳곳에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청호를 많이 돌아다녀보았지만 이런 석장승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 보네요. 장승이 있는 지역에서 장승제를 지내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역의 경계를 알리고 있는데요. 금줄로 마을 입구에 해놓는 것은 잡귀가 더 이상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덩치가 남달라 보이는 석장승인데 이 석장승 역시 마을을 지켜주는 주신이겠죠. 마을 장승제는 신성 구역을 선포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는 신전 정화를 마을 경계로 쓰고, 몽골에서는 금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위 장승은 비룡동(줄골) 장승입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의 석장승 2기가 마주 서 있는데 남장승은 북쪽을 향해 서 있고 여장승은 남동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원래 두 장승은 2.5m의 간격을 두고 서 있었는데요. 대전과 추동을 연결하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여장승을 뒤로 물려 지금은 10m의 간격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남 장승의 외형은 전형적인 문관석 형으로 높이가 2m 정도이고요. 여장승은 1.7m 정도에 사람이 얼굴을 새기었다고 합니다. 거리제를 지내고 난 후 짚으로 만든 주머니에 떡과 과일을 넣어 장승의 목에 걸어두기도 합니다. 장승의 옆으로는 은진송씨 상계당공재실로 들어가는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저도 잘 모르는 옛 지명들이 보입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이 이름으로 부르며 살았겠죠. 은진송씨의 재실로 들어가는 공간에도 장승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은진 송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9명, 상신 2명, 대제학 1명을 배출하였던 성씨입니다, 특히 목사공파(牧使公派)와 정랑공파(正郞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송춘당공원의 송준길은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송시열은 좌의정을 지내고 문묘와 종묘에 종사되었습니다. 은진(恩津)은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일대의 지명입니다. 백제의 가지내현(加知柰縣)이었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시진(市津)으로 고치고 덕근군(德近郡)의 영현이 되었다가, 1018년(고려 현종 9년)에 공주(公州)의 임내(任內)가 된 곳입니다. 그러고보니 대청호라는 지역의 광할함을 다시금 보게 되네요. 대청호(25)비룡ㅡㅇ동장ㅅ(1)송시열(8)송준길(7)은진송씨(2)장승(3)줄골장승(1)최홍대(26)12L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