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신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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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32번 시내버스 타고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 찾아가는 방법

대전 32번 시내버스 타고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 찾아가는 방법

대전 중구 어남동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인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가 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에는 신채호 선생의 생가, 동상이 있는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신채호 선생과 관련된 역사 자료를 전시하는 전시관인 단재홍보관이 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880년에 현.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 언론인입니다. 독립운동을 비롯해 중요하고 굵직한 업적을 많이 남겼으며 대한민국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업적과 정신을 기리면서 알리고자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에 신채호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면서 생가를 중심으.......

호국보훈의 달 대전시티투어 코스~ 신채호 생가지부터 보훈공원까지

호국보훈의 달의 의미를 새겨보고 호국 영령들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되새길 수 있는 여행! 대전시티투어 코스중 월요일 역사문화 코스를 탑승해 보았습니다. 대전보훈공원과 국립대전현충원이 코스에 있어 더 더욱 가보고 싶군요. 오전코스 : 09:30 대전역 출발~단재신채호생가지 ~ 무수천하마을 (유회당) 대전보훈공원 ~ 13:00 (성심당본점 경유) 대전역 오후코스 : 14 : 00 대전역 ~대전역 ~국립대전현충원(보훈둘레길) ~대동하늘공원 ~ 17:30 (중앙시장 경유) 대전역 단재 신채호 선생 생가지에서는 초등학생들의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어 활기를 띄고 있군요. 신채호선생은 이 곳  중구 어남동에서 1880년 12월 8일에  태어나 여덟살 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단재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평생을 몸 바쳐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며, 민족사관이 뚜렸한 사학자이고 언론인 이었습니다. 어릴적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어면서 자랐고 책벌레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책을 가까이 하였다 합니다. 단재는 1930년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서 57세의 나이로 순국 하였습니다. 우리 국민들의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계몽운동과 언론에 기여한 공로, 나라를 사랑하였던 애국 애족의 정신은 영원히 빛날 것 입니다. 매년 단재가 태어난 12월 8일에는 선생의 동상 앞에서 헌화식을 올립니다. 유회당은 영조때 호조판서를 지낸 권이진(1668~1734) 이 건물 뒤 언덕에 있는 부모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또 독서와 교육을 하기위해 지은 건물로 대전 유형문화재 제6호 입니다. 건물 이름이자 선생의 호이기도 한 유회당의 '유회'는 늘 부모님을 생가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는다 라고 합니다. 세가지가 있어 삼근정사라고 불렸답니다. 선친의 묘와, 담장 옆을 졸졸 흐르는 시냇물, 시냇물 흐르는 야산의 철쭉입니다. 연못을 건너 층계를 오르는 유회당의 정면 모습 입니다. 대전보훈공원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훌륭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조성한 추모공원 입니다. 영렬탑, 6.25참전 기념비, 월남참전 각인비, 위패봉안소, 6.25참전 용사비, 월남참전 기념비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영렬탑은 전쟁의 상징인 총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위패봉안소는 보훈공원의 가장 높은곳 중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국을 위해 산화한 선열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는 참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총 1,739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부슬비가 내리니 마음이 더욱더 숙연해지고 경건한 마음으로 애도를 해 봅니다.   전쟁의 상흔과 아픔을 되새겨 보도록 기증 유품과 6.25전쟁과 관련된 전시가 이루어지는 전시관입니다. 전시관의 유품에서 전쟁의 참상이 느껴져 가슴이 아려옵니다. 호국영령들의 고귀한 뜻을 새겨 보고 다시 한번 그 분들이 편안히 잠드길 기도해 봅니다.

이낙연 국무총리, 대전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 방문

3월 8일은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정부패에 맞서 대전지역 고등학생들이 분연히 일어났던 3・8 민주의거가 59주년을 맞이한 날이었습니다. 3・8 민주의거는 경찰의 폭력진압과 강제연행에 분개해 더 많은 학생과 시민들로까지 확산되었고 이후 4・19 혁명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대전시에서는 3・8 민주의거를 기리는 기념행사를 해마다 해왔고 국가기념일 지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민주화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한 3・8 민주의거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3월 8일 거행된 3・8 민주의거기념식은 59주년을 기념하는 의식이면서 처음으로 치러진 국가기념식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습니다. 특히 이날 기념식에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하여 3・8 민주의거의 높아진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시청 남문광장에서 열린 기념식 행사에 참석한 후,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를 찾아 헌화하는 일정을 이어 갔습니다. 저는 두 번째 일정인 단재 신채호선생 헌화 행사에 참석하여 취재활동을 했습니다. 이날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에 도착한 이낙연 국무총리는 먼저 단재홍보관에 들러 첫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단재홍보관에서 문화관광해설사에게 신채호선생의 일생에 대한 해설을 들은 후 간단한 브리핑이 이어졌습니다. 한선희 대전시 문화체육관광국장은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 조성 현황’과 새롭게 건립될 ‘단재 기념교육관 건립 계획’을 브리핑했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작지만 잘 가꾸어 놓았고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곳이 될 것입니다"라고 화답했습니다. 브리핑이 끝난 후 곧바로 단재 신채호선생의 동상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신채호선생의 동상 앞에 헌화를 하고 묵념을 하는 추모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선생의 동상 앞에 ‘追慕(추모)’라고 쓰인 꽃이 바쳐지고 이낙연 국무총리와 허태전 대전시장, 주요내빈들이 다함께 묵념을 하며 단재 신채호선생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넋을 기렸습니다.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를 방문하게 되면 꼭 둘러봐야 되는 곳이 선생이 여덟 살까지 소년기를 보냈던 선생의 생가인 건 다 알고 계시죠? 이낙연 국무총리도 공식 추모행사가 끝난 뒤 바로 자리를 뜨지 않고 선생의 생가까지 꼼꼼하게 둘러봤습니다.  생가에서 국무총리 일행를 맞이한 사람은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의 문화관광해설사를 맡고 있는 최은숙 해설사입니다. 최은숙 해설사는 국무총리의 방문을 맞이해 선생의 어린 시절 총기를 엿볼 수 있는 ‘연’이라는 한시를 준비했습니다. 한시에 대한 해설을 들은 이낙연 국무총리는 “여덟 살 어린 나이에 쓰신 시가 사람을 한없이 작게 만듭니다. 부끄러운 마음을 안고 돌아가야 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시종 굳고 엄숙했던 표정이 풀리면서 처음으로 웃음이 번졌습니다. 최은숙 해설사는 “시아버지가 이낙연 국무총리님의 열렬한 팬인데 요즘 건강이 조금 안 좋으십니다. 저희 시아버지께 전해 드리고 싶은데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라고 묻자 이낙연 국무총리가 건강을 기원하는 사인을 남겨 주었습니다. 이날 추모행사에는 수많은 취재진이 몰렸었습니다. 국무총리 방문 행사다보니 서울의 중앙 언론사에 대전지역 언론사까지 더해져 장사진을 이루었습니다. 국무총리가 이동하는 동선을 따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취재진 때문에 제대로 사진을 찍기도 어려웠는데요. 그래도 다른 기자들은 이건 몰랐을 겁니다.^^ 생가 정면에서 봤을 때 오른쪽으로 돌면 마루 위에 어린 시절 쓴 신채호선생의 한시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최은숙 해설사가 설명했던 한시를 찾아 봤습니다. ‘연’이라는 한시는 연 날리기에 대한 시를 쓰되 ‘연’이라는 글자를 사용하지 말라며 할아버지가 내준 시 과제였습니다. 거기에 실제로 ‘연’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고 5언 2구의 짧은 형식 속에 연 날리는 모습을 간결하게 표현한 이 작품을 신채호선생은 여덟 살 어린 나이에 남겼던 것입니다. 생가 방문까지 마치고 문을 나서려는 순간 마침 현장학습을 나온 학생들과 마주쳤습니다. 이때 “총리님, 여기 아이들하고 기념사진 한번 찍으시죠”라고 취재진의 요청이 쏟아지자 기꺼이 기념촬영에 응했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와 허태정 대전시장이 아이들과 어우러져 사진을 찍었습니다. 저는 이날 찍어 온 사진 중에서 위 세 번째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드는데요. 아이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위해 자리를 잡다보니 국무총리의 얼굴에서 정말 환한 웃음이 나왔습니다. 돌아가야 하는 국무총리의 발걸음을 붙잡은 건 아이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생가를 나와 떠나기 전 신채호선생의 동상을 다시 한 번 보고가려고 이동했는데 강원도 영월에서 이곳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까지 현장 방문을 위해 찾아온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도 역시 기념촬영을 요청했고 기꺼이 응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단재 신채호선생 추모 행사는 종료가 됐고 이제 서울로 떠날 때가 됐습니다. 떠나기 전 이낙연 국무총리는 옆에 있던 허태정 대전시장과 행사 관계자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어 "이곳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가 훌륭한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더 큰 사랑을 받는 곳이 되길 바란다"는 덕담을 남겼습니다. 단재 신채호선생 추모 행사에 참여했던 모든 분들이 돌아가고 저는 좀 더 남아 다시 한 번 선생의 생가지 풍경을 둘러봤습니다. 며칠째 이어진 미세먼지 가득했던 날씨가 추모행사가 열린 날에 맞춰 푸른 하늘이 되어 준 건 신채호선생의 의로운 기운과 강직한 성품에 감동을 받아서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분들이 이곳 단재 신채호선생 생가지를 찾아 선생의 삶의 흔적을 돌아보며 추모를 드리고 갔습니다. 앞으로 들어서게 될 단재 신채호 기념교육관의건립을 계기로 훨씬 더 많은 분들이 이곳을 찾아 선생이 남기신 숭고한 뜻을 배우고 이어받기를 바라봅니다. #이낙연국무총리방문,   #단재신채호선생추모행사,   #이낙연국무총리헌화,   #신채호선생생가지, #단재기념교육관건립

독립운동 100주년 대전의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의 흔적을 찾아서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했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한 단재 신채호. 지금 그 생가지가 복원되어 있어서 그 흔적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단재는 민족주의 역사학의 틀을 만든 사람으로,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우리의 역사를 많이 정립하기도 했죠. 지금은 행정구역상 동구에 속한 곳이지만 이 지역은 원래 대덕군으로 지역이 구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단재는 1880년 대전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나 구한말 독립협회에서 활동했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논설을 쓰며 친일파의 매국 행위를 비판했는데요. 단재는 대전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며 대전의 자부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재는 10여 세에 '통감(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곳 생가지는 단재가 태어나서 8살까지 살던 곳입니다.   단재는 26세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관을 둘러보면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한 것이나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주제로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 다양한 잡지를 발행했던 단재. 그의 글에서 이미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 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당시 활동하던 민족주의자나 독립운동가들은 사람들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조직을 만들던가 운동을 꾀함에 있어서 사람들의 진의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그 시대에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독립'이라는 것이 알게 된 것이죠. 신채호는 봉건 유생에서 자강 운동가로, 자강 운동가에서 민족주의자로, 다시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전환됐습니다. 변화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하는 과정에서 사상적 전환을 한 것을 보면 유연한 생각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 일제 하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면서 한국사 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단재 신채호. 그가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파악했다는 것이 조금 독특합니다.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추구하였으며, 감옥에 있으면서도 아나키스트로서의 삶을 영위하였던 신채호의 흔적이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